- 어느 루저의 연대기 / 김무국 작
파경
2002년 FIFA 월드컵은 한국 사회 전체의 공기를 바꾸어 놓은 거대한 축제였다. 거리마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모여들었고, 밤이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응원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해도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불렀고, 낯선 이들끼리도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며 박수를 쳤다.
그 무렵, 월드컵이 시작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왔다, 하나랑은 어느새 9학년이 되었고 하나루는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세월은 아이들을 훌쩍 키워 놓았지만, 그 시간 속에 나는 늘 함께 있지 못했다. 한국 정치와 공공활동 속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명분으로 분주하게 살아왔지만, 정작 아이들의 성장 곁에는 자주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월드컵 경기장에 갔고, 붉은 악마들이 가득한 거리 응원 속으로도 들어갔다. 수만 명의 사람이 한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장면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이 기억이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와 함께 아이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랐다.
서울의 거리 응원뿐만 아니라 놀이공원에도 갔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며 웃었다. 또 강원도 설악산의 케이블카를 타고 고성 화진포 해수욕장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뛰놀았고,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오래된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었다. 휴전선 끝자락의 통일전망대에서 분단된 철책과 단절된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금강산을 바라보며, 나는 아이들이 한민족의 아픔과 그 희망도 알기를 바랐다.
밤이 되면 작은 아파트의 좁은 침대에 셋이 함께 누워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을 청했다. 낮에는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웃고 이야기했다. 그 두 달은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가족의 시간이자, 잃어버린 시간을 잠시 되찾는 여행 같았다. 아이들은 나의 양력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화지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카드를 만들고, 방안에 각종 장식을 붙여 아빠의 생일을 축하했다. 나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감추고, 그 순간을 가슴 속에 깊이 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수가야를 위한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혼자 아이들을 돌보며 견뎌온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리라는 생각에 은근한 설렘과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도착한 날 밤, 그 기대는 조용히 어긋났다. 나는 그녀를 안고 오랜만의 정을 표현하려 했지만, 그녀는 몸이 불편하다며 나를 밀어냈다. 그저 피곤해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낯섦이 느껴졌다. 그동안 수없이 떨어져 지냈지만 이런 기색은 처음이었다. 말투와 표정,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이전과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녀에게서 다른 남자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명확한 증거가 아니라,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이기에 감지되는 미묘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녀와 아이들을 두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아온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책임의 무게는 결국 내 몫이었다.
다음 날 밤에도 그녀는 잠자리를 거부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 건지,
아니면 한국에서 살 건지 결정해 주세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우리 모두 한국으로 가서 살면 어때요?
미국에서는 내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네요.
아이들도 한국 사람으로 키우고 싶고요.”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한국어도 서툰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미국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어떤 결론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이미 내가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영혼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집 안의 공기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거워졌다. 나는 마음을 붙잡을 수 없어 잠시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를 몰아 씨에라 산맥을 가로지르는 80번 프리웨이를 타고 리노와 레이크 타호로 향했다.
카지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었다. 손잡이를 당기고 버튼을 누르고, 위스키를 시켜 마시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틀 밤 동안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을 구경하듯 멍한 상태로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다 한 번은 잭팟이 터졌다.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지만 만 달러가 나왔다. 화면에 럭키쎄븐의 동일 그림 세 개와 숫자가 번쩍이며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순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허탈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버튼 하나에도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세금을 떼고 남은 게임머니를 아내에게 건넸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미안함이었는지, 책임감이었는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어떤 표시였는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질문에 끝내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짐을 정리해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태평양 위로 올라갈 때, 창밖의 구름 사이로 어딘가 멀어져 가는 삶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 나는, 어떤 결정은 말로 선언하지 않아도 이미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 후 수가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봉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것을 뜯어보기도 전에 이미 내용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봉투 안에는 그녀의 손으로 쓴 짧은 편지와 함께, 변호사가 준비한 몇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왜 이혼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원망도 없었다. 다만 담담하게 정리된 몇 줄의 문장과 함께 하나의 조건이 적혀 있었다. 딸아이는 자신이 맡아 키우고, 아들은 내가 데려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 서류를 오래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세월과 두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겹쳐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서류에 필요한 서명을 해주는 대신, 단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이들을 서로 떼어놓고 키우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두 아이 모두를 그녀가 맡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신 나는 경제적 권리도, 친권도, 그 밖의 어떤 권리도 모두 포기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최소한 함께 자라도록 하는 것이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결혼은 조용히 끝났다. 나는 미국에 남겨 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책 몇 권, 오래 입던 옷가지, 사진첩 같은 사소하나 추억이 담긴 물건들조차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곳에는 물건보다 더 많은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는 일은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녀에게 단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아이들에게는 당분간 이혼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받을 충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나는 또 하나의 이별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의 장례였다. 부친상 공지가 신문에 나갔던 탓인지 장례식장에는 수백 명의 조문객이 찾아왔다. 많은 사람이 위로의 말을 건넸고,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그녀와 아이들이 없었다. 몇몇 친척들과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시공간적인 사정 때문이라고만 대답했다. 누구도 그 이면에 있는 나의 파경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묻혀 지나갈 것 같던 일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엄마가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한 흑인 의사와 재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아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그녀에게서 온 이메일에는 다급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하나루가 크게 분노하여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검도를 배울 때 받았던 가검을 들고 새 남자가 집에 오는 것을 막았고, 그를 만나면 죽이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전화 통화를 하면 전화를 빼앗아 ‘깜둥이’ 운운하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하나루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그 아이가 영웅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아빠잖아요.”
나는 한참 동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하나루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아빠가 한국에 있는 사이에 엄마가 바람나서 이혼한 거예요?
그 니그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하나루는 거의 울부짖듯이 말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엄마 때문이 아니다.
아빠 때문이다.”
아빠가 한국에 나와 너희와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교육비와 생활비 지원도 하지 못해서 엄마가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엄마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는 오히려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고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언과 위협적인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루는 여전히 분노에 떨고 있었지만, 잠시 후 낮아진 목소리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 아이들의 엄마는 그와 재혼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하나루는 혼자 비행기에 올라 한국으로 나를 찾아왔다. 항공사의 ‘비동반 어린이 여행 서비스(UM)’를 이용해 먼 길을 건너온 것이다. 공항에서 아들을 마주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지만, 눈빛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둘 사이를 오갔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에게 물었다. 담배나 술, 마리화나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어린 아이들도 상처를 받으면, 그런 것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루는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것들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태권도와 검도를 배우던 아이였던 그는 요즘 스케이트보드에 빠져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누나는 어떠냐?”
하나랑은 캘리포니아에서 손꼽히는 명문 공립학교인 ‘로웰 하이스쿨’에서 늘 1등과 2등을 다투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파경이 혹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그 상처가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 하나루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누나가 미워.”
이유를 물었다. 아들은 하나랑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너는 아빠 편이잖아.
그러니까 나라도 엄마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위해서 아빠랑 연락도 안 할 거야.
엄마가 결혼할 사람도 존중하고...
새아빠처럼 대할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딸아이의 사려 깊은 성정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번져 올라왔다. 그 아이가 그렇게까지 마음을 접어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하나랑과 나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길고 깊은 생이별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하나루는 그 뒤로도 매년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함께 여행을 하기도 했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 넓은 궁궐 마당을 걸었고, 만리장성 위에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성벽을 바라보기도 했다. 부산항에서 크루즈로 일본의 오사카와 교토를 다녀오기도 했다.
하나루는 여행을 즐겼다. 웃기도 하고 장난도 쳤다. 때로는 어린 시절처럼 내 어깨에 기대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순간마다 내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감정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하나랑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손을 잡고 학교에 가던 모습,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 살짝 미소 짓던 표정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억들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마치 시간이 기억을 지우는 대신, 그리움의 윤곽만 더 선명하게 깎아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하나랑은 지금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아주 가끔이라도 아빠를 떠올리는 순간이 있을까. 대답은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순간, 아무도 모르게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며, 흘러내리는 액체를 감춰야 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이별이 있고, 평생을 살아도 끝내 건너지 못하는 강처럼 마음속에 남아 흐르는 그리움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