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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32)
- 나가는 글 이제 나는 일흔이 되었다. 정치도 지나갔고, 야망도 지나갔으며, 내가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도 세월 속으로 흘러갔다. 돌아보면 나는 세상을 얻기 위해 오래 떠돌았지만 결국 많은 것을 잃어버린 채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 삶을 실패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도 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이름이 하나 있다. 그레첸! 지금 그녀가 미국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나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인생이란 결국 몇 개의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그리고 내 삶의 마지막에 남아있는 기억 하나는 아주 오래전 내가 그레첸이라 부르던 한 사람의 이름이다. 돌아보면 내 삶은 사랑과 야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을 찾으려 했던 어느 한 인간의 방황이었고, 어쩌면 그 길의 끝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그 이름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루저가 끝내 놓지 못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래서 그 이름은 나의 신앙이 되었다. 마치 스스로 무릎을 꿇고 비는 대상이 자신이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이나 십자가 같은 상징인 것처럼. 사족 존재와 소유 사이에서 내 삶에 두 여인이 등장했다. 나는 그들을 대비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 사이에서 갈등했던 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레첸, 본명은 남궁영, 우리는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 구호를 외치던 광장의 공기, 도망치듯 흩어지던 밤, 불안과 확신이 뒤섞인 청춘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의 연인이기 이전에 동지였다. 우리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고, 그녀는 미국으로 갔다. 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그레첸이라 불렀다. 아마도 그 이름은 내가 살았던 또 하나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소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였던 존재. 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사라졌기에 더 또렷해진 기억. 그녀는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한 시절이었다. 수가야는 다른 자리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나는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서 망명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국적도, 미래도, 기반도 불확실하던 때였다. 그녀를 만났고, 미국에 입국하자마자 우리는 결혼했다. 수가야는 나의 아내가 되었고,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와의 삶은 제도와 책임 위에 세워졌다. 월세와 학비, 병원비와 비자 문제, 현실은 언제나 구체적인 숫자로 다가왔었다. 나는 그레첸을 존재의 이름으로 기억했고, 수가야를 소유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고 있었다. 그 구분은 두 여인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분열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존재로 살고 싶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소유하고 안정시키고 싶어 했다. 이상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운동가적 자아와 가장으로서의 자아, 그 사이에서 나는 늘 경계인이었다. 그레첸은 나의 가능성을 상징했고, 수가야는 나의 책임을 상징했다. 나는 가능성을 그리워하면서도 책임을 떠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누구를 택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미 선택한 사람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삶을 살았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안다. 존재와 소유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 시간이 나를 더 복잡한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루저라고 말한다. 어쩌면 끝내 한 세계를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고, 한 존재로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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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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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31)
- 최절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나는 안산시 선부동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간판은 아직 내걸지 못했지만, 그 안에는 다시 정치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다는 나름의 결심이 담겨 있었다. 낮에는 지역 인사들을 만나고 밤에는 지역 현안을 정리하며 선거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의 산업경영대학원 최고위과정에 등록해 지역 경제인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통로도 마련했다. 나를 돕겠다며 파주와 서울 대림동에 살던 동생들도 가족과 함께 고잔동과 선부동으로 이사했다. 지역의 원로들, 기업인들,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만나며 안산의 산업 구조와 도시 문제를 차근차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반월‧시화 산업단지의 변화, 급속한 인구 유입으로 인한 도시 기반시설 문제,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로 나타나는 사회적 과제 등은 내가 앞으로 풀어야 할 현실의 과제처럼 다가왔다. 정치가 다시 나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오랜 방황 끝에 비로소 한 자리에 발을 붙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중앙 정치의 흐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새천년민주당 내부의 친노 세력이 집단 탈당을 감행하며 새로운 정당 창당을 선언했고, 곧 열린우리당이 등장했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당시 정치권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르던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동지들이 있었다. 당은 하루아침에 두 동강이 났고, 정계는 거대한 재편의 회오리에 들어갔다. 나는 그 흐름을 지켜보며 복잡한 심정에 빠졌다. 마음만 놓고 본다면 새로운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의 참모로 활동했던 나의 이력은 나를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정치에서 신의와 명분은 때로는 선택의 자유보다 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나는 결국 당을 떠나지 못했다. 대신 나를 따르던 연구소 직원들과 연청 후배들에게는 열린 길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새로 만들어지는 정당으로 가서 더 넓은 정치적 가능성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정세균 의원과 정동영 의원 등 내가 아는 국회의원들과 새 당의 당직자들에게 그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두말없이 떠나는 그들을 보며 묘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마치 내가 키워 보낸 새들이 다른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과도 비슷했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 한쪽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무렵 전국의 정치 지형은 이미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열린우리당은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정치판을 휩쓸기 시작했고, 민주당이라는 이름은 순식간에 낡은 간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안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에서도 그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냉정한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새천년민주당의 이름으로 출마해 봐야 당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나는 2004년 총선 출마를 포기했다. 사무실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지역 자료들과 선거 준비 서류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어야 했다. 준비는 했지만 시작조차 하지 못한 싸움,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끝나버린 정치인의 길이었다. 아! 이대로 나는 정치주변인으로 남게 된 것인가.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찾아온 것은 분노라기보다는 깊은 무력감이었다. 시대의 흐름이 개인의 의지를 얼마나 쉽게 밀어내는지, 그리고 정치라는 세계에서 한 사람의 계획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새삼 실감했다. 정치에는 패배보다 더 허무한 순간이 있었다. 싸워서 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싸움의 무대에 올라서지도 못한 채 조용히 퇴장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정의 파경은 정치적 결단에도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 같다. 선거는 단순히 개인의 결심만으로 치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긴 시간과 막대한 에너지, 그리고 무엇보다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삶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무책임한 일이었다. 출마를 접던 날, 마음은 차분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버티고 있던 무엇인가가 조용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한 시기의 삶을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차분함 속에서도 깊은 상실감이 스며 있었다. 정치인의 길을 접는다는 아쉬움보다도, 지켜내지 못한 가정에 대한 자책이 더 크게 마음을 짓눌렀다. 내 삶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시간이었다. 가정의 균열과 정치적 실패가 연이어 찾아온 뒤, 나는 잠시 다른 길을 택했다. 정치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계산과 전망은 번번이 빗나갔고, 결국 잠원동 한강 변에 있던 작은 아파트마저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한때는 삶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겼던 둥지였다. 창문을 열면 한강의 물빛이 보이던 그 집에서 나는 여러 번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고, 여름이 되면 미국에서 온 아이들과 뒹굴었다. 나는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한강 쪽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와는 상관없이 물은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잠시 서 있던 나는 문득 이상한 평온함을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무기력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차분했고, 체념이라고 하기에는 또 다른 결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남아있던 어떤 갈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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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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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30)
- 파경 2002년 FIFA 월드컵은 한국 사회 전체의 공기를 바꾸어 놓은 거대한 축제였다. 거리마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모여들었고, 밤이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응원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해도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불렀고, 낯선 이들끼리도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며 박수를 쳤다. 그 무렵, 월드컵이 시작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왔다, 하나랑은 어느새 9학년이 되었고 하나루는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세월은 아이들을 훌쩍 키워 놓았지만, 그 시간 속에 나는 늘 함께 있지 못했다. 한국 정치와 공공활동 속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명분으로 분주하게 살아왔지만, 정작 아이들의 성장 곁에는 자주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월드컵 경기장에 갔고, 붉은 악마들이 가득한 거리 응원 속으로도 들어갔다. 수만 명의 사람이 한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장면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이 기억이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와 함께 아이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랐다. 서울의 거리 응원뿐만 아니라 놀이공원에도 갔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며 웃었다. 또 강원도 설악산의 케이블카를 타고 고성 화진포 해수욕장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뛰놀았고,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오래된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었다. 휴전선 끝자락의 통일전망대에서 분단된 철책과 단절된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금강산을 바라보며, 나는 아이들이 한민족의 아픔과 그 희망도 알기를 바랐다. 밤이 되면 작은 아파트의 좁은 침대에 셋이 함께 누워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을 청했다. 낮에는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웃고 이야기했다. 그 두 달은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가족의 시간이자, 잃어버린 시간을 잠시 되찾는 여행 같았다. 아이들은 나의 양력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화지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카드를 만들고, 방안에 각종 장식을 붙여 아빠의 생일을 축하했다. 나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감추고, 그 순간을 가슴 속에 깊이 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수가야를 위한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혼자 아이들을 돌보며 견뎌온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리라는 생각에 은근한 설렘과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도착한 날 밤, 그 기대는 조용히 어긋났다. 나는 그녀를 안고 오랜만의 정을 표현하려 했지만, 그녀는 몸이 불편하다며 나를 밀어냈다. 그저 피곤해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낯섦이 느껴졌다. 그동안 수없이 떨어져 지냈지만 이런 기색은 처음이었다. 말투와 표정,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이전과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녀에게서 다른 남자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명확한 증거가 아니라,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이기에 감지되는 미묘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녀와 아이들을 두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아온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책임의 무게는 결국 내 몫이었다. 다음 날 밤에도 그녀는 잠자리를 거부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 건지, 아니면 한국에서 살 건지 결정해 주세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우리 모두 한국으로 가서 살면 어때요? 미국에서는 내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네요. 아이들도 한국 사람으로 키우고 싶고요.”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한국어도 서툰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미국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어떤 결론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이미 내가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영혼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집 안의 공기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거워졌다. 나는 마음을 붙잡을 수 없어 잠시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를 몰아 씨에라 산맥을 가로지르는 80번 프리웨이를 타고 리노와 레이크 타호로 향했다. 카지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었다. 손잡이를 당기고 버튼을 누르고, 위스키를 시켜 마시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틀 밤 동안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을 구경하듯 멍한 상태로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다 한 번은 잭팟이 터졌다.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지만 만 달러가 나왔다. 화면에 럭키쎄븐의 동일 그림 세 개와 숫자가 번쩍이며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순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허탈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버튼 하나에도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세금을 떼고 남은 게임머니를 아내에게 건넸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미안함이었는지, 책임감이었는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어떤 표시였는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질문에 끝내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짐을 정리해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태평양 위로 올라갈 때, 창밖의 구름 사이로 어딘가 멀어져 가는 삶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 나는, 어떤 결정은 말로 선언하지 않아도 이미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 후 수가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봉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것을 뜯어보기도 전에 이미 내용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봉투 안에는 그녀의 손으로 쓴 짧은 편지와 함께, 변호사가 준비한 몇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왜 이혼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원망도 없었다. 다만 담담하게 정리된 몇 줄의 문장과 함께 하나의 조건이 적혀 있었다. 딸아이는 자신이 맡아 키우고, 아들은 내가 데려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 서류를 오래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세월과 두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겹쳐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서류에 필요한 서명을 해주는 대신, 단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이들을 서로 떼어놓고 키우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두 아이 모두를 그녀가 맡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신 나는 경제적 권리도, 친권도, 그 밖의 어떤 권리도 모두 포기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최소한 함께 자라도록 하는 것이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결혼은 조용히 끝났다. 나는 미국에 남겨 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책 몇 권, 오래 입던 옷가지, 사진첩 같은 사소하나 추억이 담긴 물건들조차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곳에는 물건보다 더 많은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는 일은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녀에게 단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아이들에게는 당분간 이혼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받을 충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나는 또 하나의 이별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의 장례였다. 부친상 공지가 신문에 나갔던 탓인지 장례식장에는 수백 명의 조문객이 찾아왔다. 많은 사람이 위로의 말을 건넸고,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그녀와 아이들이 없었다. 몇몇 친척들과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시공간적인 사정 때문이라고만 대답했다. 누구도 그 이면에 있는 나의 파경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묻혀 지나갈 것 같던 일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엄마가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한 흑인 의사와 재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아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그녀에게서 온 이메일에는 다급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하나루가 크게 분노하여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검도를 배울 때 받았던 가검을 들고 새 남자가 집에 오는 것을 막았고, 그를 만나면 죽이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전화 통화를 하면 전화를 빼앗아 ‘깜둥이’ 운운하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하나루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그 아이가 영웅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아빠잖아요.” 나는 한참 동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하나루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아빠가 한국에 있는 사이에 엄마가 바람나서 이혼한 거예요? 그 니그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하나루는 거의 울부짖듯이 말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엄마 때문이 아니다. 아빠 때문이다.” 아빠가 한국에 나와 너희와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교육비와 생활비 지원도 하지 못해서 엄마가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엄마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는 오히려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고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언과 위협적인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루는 여전히 분노에 떨고 있었지만, 잠시 후 낮아진 목소리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 아이들의 엄마는 그와 재혼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하나루는 혼자 비행기에 올라 한국으로 나를 찾아왔다. 항공사의 ‘비동반 어린이 여행 서비스(UM)’를 이용해 먼 길을 건너온 것이다. 공항에서 아들을 마주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지만, 눈빛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둘 사이를 오갔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에게 물었다. 담배나 술, 마리화나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어린 아이들도 상처를 받으면, 그런 것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루는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것들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태권도와 검도를 배우던 아이였던 그는 요즘 스케이트보드에 빠져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누나는 어떠냐?” 하나랑은 캘리포니아에서 손꼽히는 명문 공립학교인 ‘로웰 하이스쿨’에서 늘 1등과 2등을 다투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파경이 혹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그 상처가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 하나루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누나가 미워.” 이유를 물었다. 아들은 하나랑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너는 아빠 편이잖아. 그러니까 나라도 엄마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위해서 아빠랑 연락도 안 할 거야. 엄마가 결혼할 사람도 존중하고... 새아빠처럼 대할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딸아이의 사려 깊은 성정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번져 올라왔다. 그 아이가 그렇게까지 마음을 접어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하나랑과 나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길고 깊은 생이별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하나루는 그 뒤로도 매년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함께 여행을 하기도 했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 넓은 궁궐 마당을 걸었고, 만리장성 위에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성벽을 바라보기도 했다. 부산항에서 크루즈로 일본의 오사카와 교토를 다녀오기도 했다. 하나루는 여행을 즐겼다. 웃기도 하고 장난도 쳤다. 때로는 어린 시절처럼 내 어깨에 기대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순간마다 내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감정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하나랑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손을 잡고 학교에 가던 모습,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 살짝 미소 짓던 표정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억들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마치 시간이 기억을 지우는 대신, 그리움의 윤곽만 더 선명하게 깎아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하나랑은 지금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아주 가끔이라도 아빠를 떠올리는 순간이 있을까. 대답은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순간, 아무도 모르게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며, 흘러내리는 액체를 감춰야 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이별이 있고, 평생을 살아도 끝내 건너지 못하는 강처럼 마음속에 남아 흐르는 그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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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9)
- 실기 재외동포법 추진기획단의 활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청와대 관저에서 들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출마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그날의 권유는 한 시절 민주화의 현장을 함께 걸어온 사람에게 보내는 신뢰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무게를 쉽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안산의 선거구 증설 가능성도 거론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기존 구도에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출생지인 정읍을 포함해 몇몇 지역을 두고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정읍을 찾는 발걸음이 잦아졌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국악신동의 아버지와 함께 지역을 돌며 사람들을 만났다. 나와 동갑인 그는 고향의 정서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지역 인맥도 두터웠다. 나는 그를 통해 지역의 숨결을 배워갔다. 정읍은 그와 그의 아들이 태어나 자란 곳이었고, 동시에 내가 태어난 뿌리의 땅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정치적 협력자를 넘어, 인생의 속내를 나누는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나는 그를 믿었다. 아니, 고향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믿음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1999년 9월, 재외동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문제가 있고 완전하지 않았지만, 오랜 진통 끝에 이룬 결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과를 자축하며 식사를 했다. 잔이 몇 순배 돌고 자리가 끝나갈 무렵,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서울 은평구의 한 호텔 사장이 같은 고향 사람인데, 호텔 지하를 게임시설로 조성하는 사업을 제안하여 추진 중이라 했다. 계약금 날짜가 급한데, 자금이 2억 원 부족하여 살고 있는 집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내게는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모아둔 1억5천만 원이 있었다. 그 돈은 단순한 현금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내 결단의 증거였고, 정치적 도전을 현실로 옮길 최소한의 기반이었다. 나는 그중 1천만 원을 생활비로 남기고, 1억4천만 원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12월 말까지는 꼭 돌려줘. 그래야 1월부터 선거사무실을 열 수 있으니까.” 그는 고맙다며, 내가 요구하지도 않은 차용증까지 써주었다. 나는 오히려 그의 진심에 감사했다. 법적 장치를 마련해주어서가 아니라, 그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2월 말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기다림은 점점 초조함으로, 초조함은 서서히 허탈감으로 변해갔다. 나는 돈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그가 더 이상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깊이 상처받았다. 처음의 절박함 대신 모호한 변명과 회피가 이어졌다. 신뢰의 언어가 끊어지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잃어버린 것은 자금이 아니라 관계였다는 것을. 선거는 자금만으로 치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의 준비가 있어야 의지도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선거사무실을 열지 못했고, 조직을 꾸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마음이 꺾였다. 고향에서, 믿었던 사람과 함께 시작하려던 도전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 나를 깊은 무력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정읍에서 그가 좋지 않은 소문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지 못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그간 출마예상자 중 한 명으로 거론하던 지역 신문 어디에서도 더는 내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돈을 잃은 아쉬움은 시간이 지나면 메워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깨질 때 생기는 균열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나는 정치적 계산보다 인간적 의리를 택했지만, 그 선택이 어리석었는지 옳았는지 판단할 기운조차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상처를 안고 출마를 강행하는 것이 옳은가. 이미 마음이 흔들린 채로 지역민 앞에 설 수 있는가. 나는 결국 포기했다. 그 결정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준비 부족 때문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믿고 내어준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주저앉혔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정치는 냉정한 계산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끝내 사람의 문제였다는 것을. 나는 출마를 접었지만, 그 선택의 이면에는 패배감보다 더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신뢰가 무너질 때 생기는 고요한 붕괴였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그 밤, 세상은 환호와 기대 속에 새천년(밀레니엄)을 맞이했지만, 나에게 그 시간은 축제라기보다 묵언의 기간이었다. 전 세계가 20세기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1000년을 연다고 들떠 있었으나, 내 마음 한편에는 이미 다른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1월 20일, 집권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신진 세력과 통합하며 새천년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새 당의 창당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국민정치연구회 인사들이 주목을 받았는데, 나는 이재정 성공회대 총장과 김근태 의원의 권유로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창립이사로 활동해왔다. 각 언론은 이를 두고 정치권 세대교체의 신호탄이라 평가했다. 그러나 내 속에서는 여전히 ‘신뢰’라는 단어가 덜컹거리고 있었다. 나는 새 당의 직능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새로 개편된 연청 중앙회의 상임부회장과 연청전략연구소의 초대 소장이라는 직함도 함께 짊어졌다. 직함은 늘어났지만, 내 마음의 빚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접어야 하는 출마의 꿈은 ‘정치적 실기’라는 이름으로 내 이력에 남을 것이다. 그해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마주 앉았다. 분단 55년 만의 역사적 만남을 지켜보며 나는 또 한 번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통일의 자주적 해결과 이산가족 교환이라는 합의문을 읽으며 가슴이 뛰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국가는 이렇게 화해의 길을 트는데, 나는 왜 한 사람과의 관계조차 바로 세우지 못했는가. 국가적 감동과 개인의 삶은 반드시 같은 박자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격동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해야 했다. 가족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며 한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을 헤집고 다닌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청와대 근무를 접고, 출마를 포기했던 정치적 실기의 기억은 피로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수가야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건 어때요? 사업을 하든, 취업을 하든...” 그 말은 제안이자 요구였고, 배려이자 경고였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지만, 솔직히 말해 내 마음은 이미 여의도 사무실 창가에 남겨둔 채였다. 아내의 질문은 우리 부부 관계의 향방을 묻는 첫 번째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그때 나는 서산대사가 <선가귀감>에서 남긴 말을 떠올렸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因地而倒, 因地而起).” 나는 정치에서 넘어졌다. 그렇다면 다시 일어설 자리도 정치의 땅이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신뢰의 붕괴와 금전적 손실, 그리고 그로 인한 출마 포기, 그 상처는 사람을 보는 눈을 조금 더 냉정하게 만들었다.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검증이라는 사실을, 동지는 구호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체감했다. 며칠 뒤 나는 다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이들의 시선과 아내의 물음은 마음 깊이 남겨둔 채였다. 어쩌면 그때의 선택이 또 다른 빚을 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1000년의 시간을 말했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을 다시 세우는 1년이 더 절실한 과제였다. 나는, 넘어졌던 바로 그 땅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주최하는 인권상 수상자들과 함께 나는 거의 해마다 청와대를 찾곤 했었다. 그러나 그 방문들은 대체로 공식 행사에 가까웠고, 대통령과 단독으로 마주 앉아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는 그의 일정이 더욱 빡빡해져, 청와대의 문턱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듯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나는 미국 본부의 민수종 소장과 함께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을 찾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위해 활동해 온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향후 진로, 더 구체적으로는 연구소의 해산 여부에 대해 대통령의 의견을 직접 듣기 위해서였다. 집무실에서 마주한 대통령은 먼저 그동안 연구소가 해 온 활동을 차분히 회고했다. 해외와 국내를 잇는 인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위해 노력해 온 점을 높이 평가했고, 지난 대선에서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했던 우리의 노고를 따뜻하게 위로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현실적인 판단을 덧붙였다. 이제 국가 차원의 공식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으니,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연구소가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로 구성된 사조직처럼 오해받는 상황도 바람직하지 않으니, 이 시점에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민수종 소장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의 설립 취지가 국가 제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역할은 충분히 다한 셈이었다. 우리는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 연구소를 정리하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준비하고 있던 제5회 인권상 시상식을 끝으로 공식 활동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하는 연구소 각 지회 대표단들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활동 종료를 선언할 생각이었다. 대화가 일단락될 즈음, 나는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지난 총선에서 결국 출마하지 못했던 사정을 설명하며, 그 과정에서 결단심과 용기가 부족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정치라는 길을 오래 바라보고도 마지막 문턱에서 친구와의 신뢰의 문제로 주저했던 마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정치에서는 한 번의 기회가 전부가 아니니, 차기 총선에서 다시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격려했다. 안산 지역은 인구 증가로 분구가 확실시되고 있으니 정치적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이라고, 마치 귀띔하듯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 전에 다음 대선을 준비하고 있는 당의 후보를 적극적으로 도와 정치적 역량을 보여 줘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 말은 길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오래 울리는 여운을 남겼다. 청와대를 나선 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앞으로의 진로를 놓고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정치의 길을 향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여러 갈래의 생각이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결국,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2002년 대선을 준비하고 있던 이인제 후보를 돕는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오랜 민주화 세력의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나는 하나의 상징적인 구호를 마음속에 떠올렸다. ‘DJ 시대를 잇는 IJ 시대.’ 여기서 DJ는 김대중 대통령이 열어 놓은 민주주의와 개혁의 시대를 의미했고, IJ는 그 시대 위에 펼쳐질 인터넷 세대의 정치를 뜻하는 표현이었다. 20세기의 정치가 연설과 신문, 조직 동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아날로그 정치의 시대였다면, 새천년은 분명히 인터넷과 디지털 네트워크가 여론과 참여를 바꾸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IJ로 상징되는 이인제 후보가 인터넷 시대 자키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만든 구호였다. 나는 먼저 연청 활동을 통해 형성된 전국 조직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모으는 작업에 나섰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연청 인맥과 조직을 IJ 캠프와 연결하며,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정치의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기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그때의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인제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기 약 두 달 전부터 나는 서울 자곡동 교수마을에 있는 그의 자택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선거 준비를 도왔다. 당시 나는 오랫동안 해외 활동과 지난 대선에서 쌓아온 인적 네트워크와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선거 전략과 조직 운영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이 후보는 종종 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곤 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김 동지를 장관급으로 쓰겠소.”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나를 격려하기 위한 정치인의 상투적인 표현이었는지, 혹은 순간의 감정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그의 곁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며 그의 성정과 일상적인 태도를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는데,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그의 말과 기억이 늘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전날 밤늦게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다음 날 다시 찾아오면, 그는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 순간 상대방의 얼굴에는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는 것을 보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조언했다. “후보님, 앞으로는 누굴 만나든 ‘처음 뵙겠습니다’ 대신 ‘이렇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깜박하는 기억을 친근함으로 바꿔보려는 작은 장치였다. 정치에서는 기억의 공백도 태도로 메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작은 균열들이 훗날 거대한 정치적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해 봄, 한국 정치사에는 전례 없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되는 국민 참여형 대통령 후보 경선이었다. 당원과 일반 국민의 비율을 50대 50으로 반영하고, 2002년 3월부터 4월까지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를 순회하며 투표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언론은 이 경선을 두고 ‘각본 없는 16부작 정치 드라마’라고 불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이인제 후보가 줄곧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조직력과 인지도, 정치 경력 모두에서 그는 유력한 ‘대세 후보’였다. 그러나 드라마의 첫 장면부터 예상 밖의 반전이 시작됐다. 3월 9일, 제주에서 첫 경선 결과가 발표되자 회의장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동교동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압도적 1위를 예상했던 이인제 후보는 한화갑 후보에게 간발의 차로 밀려 2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이 조용히 떠올랐다. 노무현, 그는 3위를 기록하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드러냈다. 결과를 듣고 난 뒤 이인제 후보는 몹시 격앙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거 이상하지 않소? 청와대가 리틀 DJ라고, 한화갑을 몰래 밀어주는 것 아니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제주에서는 연청 회원들이 의리 차원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전체 경선에서는 어렵다고 보니 제주만큼은 한화갑 후보를 1위로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설명은 그의 분노를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했다. 다음 날 울산 경선은 더 충격적인 결과를 낳았다. 노무현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이인제 후보는 3위였다. 제주와 울산의 선거인단 규모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의 정치적 시선이 집중된 첫 두 경선이었다. 그 상직적 충격은 실제 숫자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 이틀 후, 돌이킬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충청권 대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인제 후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제주와 울산 경선은 연청 회원들의 장난입니다. 내가 최종 후보가 되면 연청부터 해체하겠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낳을지, 그 자리의 누구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얼마 뒤 그 말은 곧바로 다른 캠프로 흘러 들어갔다. 노무현 캠프의 수장이며 전략가였던 염동연 초대 연청 사무총장이 광주와 전남의 연청 회장단을 불러 이 사실을 공개했다. “이래도 여러분은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겠습니까?” 순간 회의장은 술렁였다. 연청은 김대중 정치의 근간 조직이었고, 민주화 운동의 기억을 공유한 세대였다. 그들에게 ‘해체’라는 말은 단순한 조직 정리가 아니라 정치적 모욕처럼 들렸다. 결국, 그 자리에서 흐름이 바뀌었다. 연청 조직 상당수가 이인제 지지를 철회하고 노무현 지지로 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광주 경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3월 16일, 호남의 심장부에서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영남 출신의 정치인 노무현 후보가 37.9%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1위를 차지했다. 그 순간 정치권에서는 ‘노풍(盧風)“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태어났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카드로 노무현 후보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은 전략적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인터넷 카페에서 시작된 지지 모임 ‘노사모’의 회원 수는 수백 명에서 수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정치는 더 이상 조직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조직도 그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그 이후 이인제 후보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대전과 충남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이미 흐름은 바뀌어 있었다. 정치는 종종 수치보다 분위기가 먼저 승패를 결정한다.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리던 ‘대세 후보’ 이인제는 예상치 못한 노무현 돌풍 속에서 서서히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곁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선에서 패배한 뒤 이인제 후보는 2002년 대선 직전, 민주당을 탈당하고 이회창 후보를 돕겠다고 선언했다. 그 순간 그의 이름 위에는 다시 ‘경선 불복의 아이콘’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리고 그 정치적 낙인의 그림자는 그를 보좌했던 사람들에게도 함께 드리워졌다. 그의 곁에서 전략을 논의하고 조직을 움직였던 나 역시 정치의 낭떠러지 아래로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또 하나의 정치적 실기였다. 그러나 그 실기는 언제나 그렇듯, 내가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운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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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8)
- 동체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상우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재외동포법 제정 추진기획단’을 공식 출범시켰다. 나는 이광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공동대표, 이구홍 해외교포문제연구소장, 이종훈 재외한인학회 부회장, 노영돈 인천대법학과 교수 등과 함께 참여해 실무를 총괄했다. 당시 우리의 문제의식은 단순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세계 곳곳에 흩어진 동포들이 700만 명 이상 늘어났음에도, 국적을 상실한 순간 그들은 법적·제도적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다. 출입국, 체류, 취업, 재산권 행사 등 기본적 권리조차 체계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해외교포’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법적 실체는 없었다. 우리는 그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당시 ‘해외교포’라는 개념은 법률적 정의라기보다 외교적 편의에 따른 행정적 분류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 기준이 국가별로 다르게 적용되며, 구조적으로 차등과 배제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비교적 폭넓게 인정했다. 시민권자와 영주권자는 물론, 한국 기업 주재원과 유학생까지 ‘교포’범주에 포함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일본에 귀화한 한인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계열을 사실상 배제하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소속 교민과 주재원·유학생을 중심으로 인정하는 식이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중국과 구소련(CIS) 지역에 대한 기준이었다. 중국의 조선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동포들은 역사적·민족적 연원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포’로 인정받지 못했고, 오직 한국 국적을 유지한 채 파견된 주재원과 사업가, 그리고 유학생만이 행정상 ‘교포’로 분류되었다. 같은 민족적 뿌리를 두고도,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인정 여부가 갈리는 현실, 그것은 외교적 이해관계가 민족적 연대와 헌법적 평등 원칙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나는 이러한 차등적 정의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해외교포’라는 모호하고 외교 편의적인 용어 대신, 헌법적 가치와 역사적 연속성을 반영하는 ‘재외동포’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의 입장은 분명했다. 미국 시민권자도, 일본 귀화 한인도, 중국 조선족도, CIS 지역 고려인도, 그리고 기업 주재원과 유학생도 모두 대한민국의 인적 자산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연원을 공유하는 동포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국적의 형식이나 체류자격, 혹은 거주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동포성을 선별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나는 약 30만 명에 이르는 해외입양인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입양인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적과 언어, 문화적 토대를 상실한 채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존재들이다. 그들을 ‘교포’범주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국가가 과거의 정책적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일과 다름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는 전 세계 700만 명에 이르는 이들 모두가 ‘재외동포’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단순한 행정 범주의 확대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었다. 대한민국은 영토 안에만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역사적 이동과 이산(離散)의 경험을 함께한 공동체라는 인식, 그리고 동포의 범위를 외교적 계산이 아니라 헌법적 평등과 역사적 책임에 기초해 재정의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였다. 재외동포법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이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동포’란 누구인가. 나는 그 답이 국적 취득 시점이나 거주국, 이념 성향에 따라 갈라질 수 없다고 믿었다. 동포는 행정이 부여하는 신분이 아니라, 역사와 혈맥, 그리고 공동체적 기억 속에서 형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획단 활동이 무르익을 무렵, 예상치 못한 벽이 나타났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재외동포법 제정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외교부는 ‘외교적 마찰’을 이유로 들었다. 중국 등 관련국이 자국 내 소수민족, 특히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직접관리’로 오해할 수 있으며, 이는 양국 관계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외교부는 대한민국 법무부가 별도로 추진하던 재외동포 특례법안에 대해서도 같은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그 무렵 외교부가 재외동포법의 주요 내용과 반대 입장을 담은 검토 의견을 전 재외공관에 통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실상 정부 내부에서 법 제정을 저지하기 위한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던 셈이었다. 나는 항의하기 위해 외교부를 방문했다. 조OO 재외국민영사국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조선족은 많은 국민이 생각하듯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친북 인사들의 후손이거나, 한반도에서 문제를 일으켜 만주로 피신했던 범법자들의 후손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 중 10만 명 정도만이라도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해 활동한다면, 그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전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외교부가 반대하는 속사정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 국가의 고위 외교관이 해외동포를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 규정하는 인식, 그것도 역사적 고난을 겪은 동포 집단을 향해 근거 없는 혐오와 공포를 전제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태도에 깊은 충격과 실망을 느꼈다. 그것은 정책적 견해 차이를 넘어, 국가가 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였다. 더욱이 외교부가 법 제정과 관련해 중국과 미국 측에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타진하고, 반대입장을 표명해주길 요청했다는 사실까지 확인되었다. 주권국가의 입법 사안을 두고 타국 정부의 반응을 먼저 살피고 내정 간섭까지 요청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굴욕외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나는 이 정보와 문건을 입수해 중앙 언론에 공개했다. 파장이 일었고, 논쟁은 공개 영역으로 옮겨갔다. 우여곡절 끝에 1999년 9월, 마침내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이른바 재외동포법이 제정되었고, 12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재외동포의 체류 자격과 법적 지위를 체계적으로 규정한 첫 법률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컸다. 그러나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외교부의 집요한 반대 속에서 법의 적용 대상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 또는 그의 후손’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이주한 중국과 CIS 지역 동포들은 혜택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역사적 맥락을 외면한 정의였다. 국권 상실과 식민지 지배, 전쟁과 분단이라는 격변 속에서 타국의 국적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정부 수립 이전’이라는 이유로 동포 범주 밖에 두는 것은 또 다른 상처였다. 특히 중국과 구소련 지역 동포들은 재외동포법상의 혜택을 받지 못해 ‘동포’로 인정받지 못하는 역차별 문제에 직면했다. 이 차별적 정의는 결국 2001년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제동이 걸리게 된다. 헌법재판소는 정부 수립 이전 이주자를 배제한 조항이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2004년 법 개정을 통해 ‘정부 수립 전 이주자’도 재외동포의 범위에 포함되도록 개선되었다. 돌이켜보면 재외동포법 제정 과정은 단순한 입법 투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대한민국의 동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국가가 역사적 책임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대였다. 외교적 부담을 이유로 동포를 배제하려 했던 관성, 그리고 그에 맞서 헌법적 가치와 역사적 연대를 호소했던 움직임 사이의 긴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국가는 국경으로만 정의되는가, 아니면 기억과 역사, 그리고 공동체적 책임으로 확장되는가. 재외동포법은 그 질문 위에서 태어났고, 수정되었으며, 또 진화하고 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나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제정한 다섯 번의 한국인권상 시상식을 직접 기획하고 주관했다. 준비 과정은 언제나 치열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해외 각 지회와의 연락, 수상자 선정, 국내외 인사 초청, 행사장 섭외와 의전까지 모든 과정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시상식 당일, 수백 명의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권의 가치를 확인하는 장면을 마주할 때면 지난한 준비의 시간은 순식간에 보상받았다. 연구소는 1998년 10월 13일 창립 15주년을 맞아 여의도 63빌딩에서 제1회 인권상을 시상했다. 첫 수상자는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국대사와 고영근 목사였다. 한국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는 자리였다. 행사장에는 이희호 여사를 비롯해 정‧관‧학계 인사 400여 명,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20여 지회에서 온 300여 명 등 700여 명이 참석해 장관을 이루었다. 1999년 제2회 시상식에서는 문동환 목사와 토머스 포그리에타 전 이탈리아 주재 미국대사가 수상했다. 독재에 맞선 신앙적 양심과 국제사회에서의 연대가 함께 조명되었다. 2000년 제3회 시상식에서는 이돈명 변호사, 계훈제 선생, 김찬국 교수가 공동 수상했고, 2001년 제4회 시상식에서는 한승헌 변호사와 패리스 하비 목사가, 특별상은 이해학 목사가 받았다. 2002년 9월에는 서울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제5회 시상식이 열렸다. 인권변호사인 이덕우 변호사와 한국 노동자 인권을 위해 헌신한 조지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수상했다. 시상식마다 매번, 김대중 대통령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고, 청와대로 수상자들과 연구소 관계자들을 초청해 오찬이나 만찬을 함께 했다. 대통령은 군사정권 시절 미국 망명 시기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해 고락을 같이하며 열의와 정성을 다해 가시밭길을 달렸던 시간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동지애로 걸어온 민주화의 행진이 마침내 1997년 평화적 정권교체로 이어졌음을 강조하며, 민주인권 국가의 구현이 ‘국민의 정부’의 국정철학임을 밝혔다. 인권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이며, 우리의 행진은 멈출 수 없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단순한 축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함께 고난의 시간을 건너온 이들에 대한 연대의 확인이었고, 과거의 투쟁이 현재의 국가 운영 철학으로 이어졌음을 선언하는 증언과도 같았다. 다섯 번의 시상식은 망명과 연대, 투쟁과 귀환, 그리고 제도권 민주주의 완성으로 이어진 한 시대의 축약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한복판에서, 기획자이자 동지로서 그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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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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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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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7)
- 춘몽 일주일 뒤, 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공항의 공기는 태평양의 바다 냄새를 머금고 있었고,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다. 수가야와 아이들은 반가움으로 나를 맞았고, 집 안에는 웃음과 온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그 따뜻한 거실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서울, 여의도, 그리고 다가올 변화의 소용돌이가 이미 나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귀국해야 할 사정이 생길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의도 사무실을 정리하지 않았다. 상근 직원들도 그대로 출근하도록 했다. 마치 잠시 비워둔 전초기지처럼, 그 공간은 나의 또 다른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연청의 샌프란시스코 지회 동지들을 찾아 회포를 풀었다. 교포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며 향후 정국에 대한 전망과 재외동포 사회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그즈음, 나는 윌리 브라운 시장을 예방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흑인 정치인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그의 경륜과 유연함은 언제나 내게 배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나의 행보를 격려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비서실장이던 유재건 의원이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짐을 꾸려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곧장 국회 의원회관으로 향했다. 유 의원은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인사는 길지 않았다. 그는 곧장 내 이력서와 소개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리고 재외동포법 제정을 위한 기획단을 구성하는 실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과거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이철수 사건’을 무료 변론해 무죄 판결을 받아낸 인물이었다. 인권과 정의의 문제에 있어 결코 타협하지 않는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가 국회의원이 된 이후 비로소 본격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마련해온 ‘재외동포기본법’ 초안을 토대로 법무부와 외교부 담당 국장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기획단 구성을 위한 인사 추천을 의뢰했다. 나는 해외에서 살아온 동포들의 삶을 떠올리며, 그들의 권리가 선언이 아닌 제도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15대 대통령 취임을 하루 앞둔 전야제에서 나는 당선자의 약력을 소개하는 순서를 맡았다. 무대 위에서 나는 한 인물의 삶을 정리하며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되짚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 초청받아 앞자리에 앉았다.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긴 세월의 투쟁과 망명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취임 후 열흘쯤 지난 어느 주말, 나는 연락을 받고 청와대 관저로 향했다. 대통령 내외와의 오찬 자리였다. 이희호 여사는 발을 절고 계셨다. 전임 대통령 시절 깔려있던 카펫을 걷어내고 한옥 구조에 어울리도록 온돌식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바퀴 달린 의자를 그대로 사용하다 미끄러져 넘어지셨다고 했다. 그러나 여사는 아픔을 감추고 밝은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 환대는 오랜 고난을 견딘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품위가 담겨 있었다. 식사 도중 대통령은 기자들 사이에서 ‘미주파’가 청와대를 장악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며 허허롭게 웃으셨다. 차기 총선에서 어느 지역을 맡아 출마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 삶은 늘 현장에서 시작해 현장에서 끝나는 길을 걸어왔다. 방송국에서, 거리에서, 해외 동포사회에서, 그리고 여의도에서.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시험대가 눈앞에 놓인 듯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람과 여의도의 공기가 내 안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나는 다시 선택의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은 단순한 정치적 결단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역사 속으로 던지는 선택이었다. 대통령은 나를 바라보며 잠시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잔잔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근무하면 자네는 나의 부하가 되겠지. 그러나 출마하여 나를 돕는다면, 자네는 나의 영원한 동지일세.” 그 말씀은 격려이자 시험이었다. 권력의 중심에 머무르는 길과 험지로 나가 스스로 책임을 짊어지는 길 사이에서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 분이 왜 오랜 세월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내 사람을 잃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직위를 제안하는 대신 관계를 제안했다. 상하의 질서가 아니라 동지적 연대를 말했고, 자리보다 책임을 강조했다. 이희호 여사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우리 대화를 지켜보고 계셨다. 발을 다친 불편함 속에서도 그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부부가 함께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그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관저를 나서며 나는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선택은 분명해졌지만, 그 선택이 가져올 파장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샌프란시스코의 가족, 여의도의 사무실, 그리고 찾아야 할 낯선 정치 지형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점령했다. 청와대를 나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며칠 전의 한 장면이 문득 내 처지와 오버랩되었다. 나는 유재건 의원과 함께 그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 초대 내각 발표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작은 브라운관 화면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실내 공기는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대선 기간 내내 총재비서실장으로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후보를 보좌했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방미 일정 중에는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을 비롯한 여러 공식 행사에서 직접 통역을 맡았다. 워싱턴 정가와 언론 앞에서 후보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그는 밤늦도록 원고를 다듬고 발음을 점검했다. 그 수고를 나는 곁에서 보았었다. 대선 승리 이후, 그는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기대하는 눈치였었다. 그러나 동진정책의 상징적 인선으로 김중권 씨가 비서실장으로 일찌감치 발표되었기에, 그에게는 많은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발표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문화관광부 장관에 신낙균 씨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누구를 원망하는 기색도, 격한 감정의 표출도 없었다. 다만 오랜 시간 곁에서 헌신해온 사람의 기대와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며 흘러내린 물기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앵커의 해설과 함께 새로운 내각의 명단이 자막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 사무실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침묵이 내려앉았었다. 정치는 승리의 환호 뒤에 늘 누군가의 상실을 남긴다. 빛이란 그림자도 만들기 때문이리라. 그날 나는 권력의 중심으로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또 다른 고독을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 청와대 관저에서 대통령의 제안을 들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며, 마음 한켠이 씁쓸해졌다. 역사는 거대한 흐름으로 움직이지만, 그 속을 건너는 것은 결국 사람의 감정과 기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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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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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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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6)
- 신승 1997년 겨울의 공기는 유난히 매서웠다. 거리에는 ‘IMF’라는 영문 약자가 공포처럼 떠돌았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분노와 불안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그 분노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김영삼 정부를 향했다. 그때 김대중 후보는 오랜 민주화 투쟁의 경력을 단단한 자산으로 삼아 유세에 나섰다. 그의 연설은 격정 대신 절제를, 분노 대신 책임을 담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정권을 비판하지 않았다.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IMF 경제위기 극복, 그리고 헌정 사상 첫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가 그의 유세를 관통하는 핵심 명분이었다. 특히 김종필 씨와의 DJP 연합은 선거판을 뒤흔드는 변수였다. 보수층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고, 중도층에게는 안정감을 주는 묘수였다. 정치적 계산을 넘어선 결단처럼 보이기도 했고, 시대가 요구한 타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중앙 부회장으로서 연청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전국 30만 회원들에게 선거운동을 독려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임무가 아니었다. 중앙회는 8명의 부회장단을 나누어 취약 지역을 책임지게 했다. 나는 노인수 부회장과 함께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그곳은 이른바 ‘TK’의 심장부이자 우리에게는 가장 험난한 정치적 지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대구는 단순한 전략 지역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나의 처가가 있었다. 장인의 집 거실에 앉아 마시는 차 한 잔에서 피어오르는 향기, 장모의 걱정 어린 눈빛, 처제와 처남들의 조심스러운 질문들이 동시에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거리 유세에 나설 때마다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정치적 신념으로는 설득해야 할 지역이었지만, 정서적으로는 나의 또 다른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유세가 격해져 가족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처가 식구들이 주변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도 스쳤다. 그러나 그들은 말없이 나를 응원해주었다. “힘들지요”라는 짧은 한마디 속에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12월 5일, 김 후보가 대구를 찾았다. 그는 수출 증대, 저축 확대, 소비 절약을 통해 1년 반 안에 IMF 체제를 반드시 극복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다짐이었다. 경북대학교를 찾아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젊은이들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 이어 박태준 자민련 총재와 박준규, 김복동, 박철언 의원 등을 앞세우고 거리 유세에 나섰다. 그는 외쳤다. “지역이 아니라 인물을 보고 선택해주십시오.” 그의 TK 표심 잡기 노력은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 방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상징적 행보였다. 역사적 적대의 기억을 넘어, 통합의 메시지를 던지려는 시도였다. 놀랍게도 그 지역에서의 지지율은 8%에서 12%까지 상승했다. 수치로 보면 미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땅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이회창 후보 측은 노골적으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선거운동 막판,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비극을 맞았다. 연청 대구 북구 갑의 장OO 지회장이 김대중 후보 유세를 마친 뒤 새정치국민회의 당원들과 함께 있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를 받고 홀로 자리를 떠났다. 약 30분 뒤, 그는 변을 당했다. 정황상 누군가가 전화로 그를 불러냈고, 나가서 만나자마자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정치적 동지를 잃은 충격도 컸지만,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로 내가 며칠 전 머물렀던 도시, 처가가 있는 그 대구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을 짓눌렀다. 선거는 치열했지만, 나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정치의 영역에 머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공동선거캠프를 꾸리고 있던 자유민주연합과 새정치국민회의는 즉각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적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자리였다.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지만,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았다. 그 겨울의 대구는 내게 두 얼굴로 남아 있다. 하나는 통합을 외치던 연설의 울림이 남은 광장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서 스러진 한 동지의 침묵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가족이 사는 도시에서 정치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했던 나 자신의 복잡한 심경이 겹쳐 있다. 정치는 때로 역사로 기록되지만, 그 시간 속을 통과하는 개인에게는 가족과 신념, 두려움과 책임이 얽힌 삶 그 자체였다. 선거일을 일주일 앞두고 발표된 여론조사 수치는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했다. 영남지역의 투표율이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미 지역 구도는 굳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판 결집은 언제나 변수였다. 상대 진영, 즉 이회창 후보 측은 노골적인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 “기권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 그 말은 계산된 공포였고, 지역감정의 오래된 심지를 다시 건드리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영남지역에서 최소 5% 이상의 투표율 상승 조짐이 나타났다. 영남 유권자가 전체의 28%였으니, 5% 상승은 전국 득표율로 환산하면 1.4% 이상을 움직일 수 있는 규모였다. 숫자는 냉정했다. 우리는 이미 박빙의 승부를 예상하고 있었고, 그 1% 남짓한 차이가 역사를 가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캠프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12월 14일, 마지막 TV 토론회가 열렸다. 스튜디오 조명 아래 선 김대중 후보는 노련했다. IMF 외환위기의 해법, 구조조정의 방향, 남북관계 구상까지 논리와 경험을 겸비한 답변이 이어졌다.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는 토론이었다. 우리는 “이제 됐다”고, 적어도 토론만큼은 완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격차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를 실감했다. 김 후보가 잘하면 잘할수록, 오히려 뿌리 깊은 반DJ정서가 자극되는 현실, 능력과 준비됨이 설득이 되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으로 전화되는 기묘한 심리, 그것이 우리가 넘어야 할 또 하나의 벽이었다. 선거 3일 전, 서울에서 역전당했다는 조사 결과가 보고되자 캠프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가든팀’을 이끌던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영작 박사가 급히 일산 자택을 찾았다. 그는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히 대구, 부산에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표를 다지십시오. 후보님이 강세를 보이는 서울 1지역과 2지역을 다지시고, 서울 3지역 역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는 민생문제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 후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알았다.” 그 한마디에는 결단이 담겨 있었다. 원래 계획은 17일 오전 서울 유세를 마친 뒤, 오후에 대구와 부산으로 내려가 유세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영남 유권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전략은 수정되었다. 그는 16일에 이어 17일 하루 동안 무려 12곳을 도는 강행군을 택했다. 철인의 체력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그날 새벽부터 아현시장, 청량리역, 강남터미널 등 서울의 각 지역을 30분 간격으로 숨 쉴 틈 없이 옮겨 다니면서 최대 승부처의 하나인 수도권 부동표 공략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연설이 거듭될수록 청중들을 빨아들이는 특유의 대중연설 솜씨로 부동층의 마음을 파고들려 했다. 특히 청량리역 앞 유세에서 청중들이 역광장을 가득 메우자, 김 후보는 상기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선거를 여러 번 했지만, 이번에도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열기를 보니 이번에는 당선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농반진반의 조크였지만 대중은 환호했다. 그는 또 “4천 5백만 국민을 태운 버스운전을 초보운전사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며 자신이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는 경륜과 외교능력을 갖고 있음을 강조했다. 저녁 7시 무렵, 서울 명동, 저녁 공기는 매서웠고, 인파의 숨결은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곳에서 마지막 연설이 울려 퍼졌다. 김 후보는, IMF로 흔들리는 삶, 직장을 잃게 되는 고통, 그러나 반드시 회복해야 할 민생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힘주어 말했다. 군중은 환호와 침묵을 번갈아 보냈다. 나는 그 마지막 유세까지 함께했다. 연단 아래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지쳐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오히려 패배의 가능성까지 감내해야 하는 순간이었지만, 그는 담담했다. 그날 밤, 1997년 대선의 장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우리는 아무도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 채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 며칠간의 결단과 집중이, 결국 역사의 방향을 가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통계와 여론조사 너머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택으로 완성될 것이었다. 12월 18일, 마침내 그날이 왔다. 반세기 가까이 한 번도 넘지 못했던 벽,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과제가 국민의 손에 맡겨진 날이었다. 새벽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오래 눌려 있던 기대와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이날 아침, 김대중 후보는 오전 7시 40분경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일산 자택 인근 정발산동 제2투표소, 정발중학교에서 투표를 마쳤다. 검은 코트를 여미고 투표소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담담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수십 년 정치 인생의 굴곡과 결기가 서려 있었다. 수차례의 암살 위협과 생환, 사형선고와 망명, 끝없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침묵이었다. 투표를 마친 뒤 그는 자택에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았다. 당의 주요 인사들과 국회의원들은 당사에 마련된 개표 상황실로 향했고, 나는 ‘가든팀’과 한국인권문제연구소 동지들과 함께 마포의 홀리데이 인 서울 호텔 16층 스콜피오 홀을 통째로 빌려 만든 임시 상황실에서 자리를 잡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텔레비전 여러 대가 동시에 켜져 있었고, 각 방송사의 출구조사 자막이 쉴 새 없이 흘러갔다. “1위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 39.9% (예측 당선) 2위 이회창(한나라당): 38.9% 3위 이인제(국민신당): 19.7%”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의 출구조사가 1% 차이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예측했지만, 우리는 불안감을 떨구지 못했다. 누군가는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했고, 누군가는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초반 개표는 숨 막히는 접전이었다. 이회창 후보와의 격차는 오차범위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숫자는 냉정했고, 우리는 그 숫자에 울고 웃었다. 시간이 깊어갈수록 말수는 줄어들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수도권과 충청권의 개표가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고,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는 그래프가 화면에 나타났다. 12월 19일로 날짜가 바뀌었고, 방송사 앵커들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동아일보가 가장 먼저 당선 확정 호외를 발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누군가 “됐습니다!”라고 외쳤고, 순간 상황실은 울음과 환호로 뒤섞였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얼굴을 감싸 쥐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전율이었다.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시대의 승리라는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뒤, 김 후보는 “오늘의 승리는 위대한 국민의 승리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한 문장은 그의 정치 인생 전체를 요약하는 선언처럼 들렸다. 이튿날 오전, 당사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그는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국정 운영 방향을 밝히며 곧바로 ‘당선인’의 책임을 짊어졌다. 환희에 머무르지 않고 곧장 국가적 위기 앞에 서는 모습이었다. 최종 결과는 총 유효투표의 40.3%, 10,326,275표로 38.7%를 얻은 이회장 후보를 약 39만 표 차로 누른 승리였다. 숫자로 보면 근소했지만, 역사적 의미로는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는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을 넘어 수도권과 충청권, 제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충청권은 DJP 연합을 통해 마음을 모아주었고,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에서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영호남 인구 구조의 벽을 넘어선, 정치 지형의 균열이었다. 그날 새벽, 호텔 창밖으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지켜본 것은 단순한 개표 방송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 민주화 투쟁의 결실이 화면 속 숫자로 환원되는 장면이었고, 좌절과 망명의 세월이 한 표 한 표로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1997년 12월 18일과 19일 새벽, 그 시간은 내 삶에서도, 이 나라의 현대사에서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장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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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연재
- 사랑과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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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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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5)
- 변태 전진대회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내 마음은 이미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 있었다.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이제는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결국 귀국해 대선을 직접 지원하겠다고 결심했다.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계산이 오갔지만, 결론은 단순했다. 여기까지 관여했으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심은 쉽고, 실행은 무거웠다. 샌프란시스코에 남겨질 가족과 방송사업이 문제였다. 베이지역의 안개처럼 늘 곁에 있던 일상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하나랑과 아직 유치원생인 하나루, 그리고 병원에서 교대근무를 하며 환자들을 돌보는 아내가 걱정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그 빈틈은 고스란히 수가야의 몫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느 저녁, 아이들이 잠든 뒤 수가야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국의 상황, 대선의 의미, 그리고 내가 맡고 있는 역할과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히 설명했다. 말끝이 흐려질 때마다 그녀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녀는 뜻밖에도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들 걱정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다녀오세요.” 그 말은 허락이자 격려였고, 동시에 나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는 약속이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 정치적 결단보다 더 무거운 가정의 결단을 받아 안았다는 것을 알았다. 남은 것은 방송국 문제였다. 내가 설립하고 운영해온 라디오 방송은 단순한 사업체가 아니었다. 이민자의 삶과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담아온 작은 공론장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미디어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시작했고, 컴퓨터만 있으면 한국에서 송출되는 한국어 방송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시공간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지역 기반의 라디오 방송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나는 그 변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파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더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환경에 맞게 탈바꿈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한국의 대선 정국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반쯤 걸친 발로는 어느 쪽도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었다. 결국, 나는 신문기자 시절 나를 아껴주고 지도해주었던 전 동아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장인 김동옥 회장에게 방송을 넘기기로 했다. 그에게라면 방송의 공적 성격과 지역사회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인수인계를 논의하던 자리에서, 마치 오래 키운 자식을 타지로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과를 이뤄온 방송이었기 때문이었다.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모든 준비가 정리되어 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가벼워지면서도 묘하게 비장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귀국이 아니라, 삶의 축을 다시 옮기는 일이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바다 냄새와 안개 낀 아침을 뒤로하고, 또 한 번 역사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청 중앙회장인 정세균 의원을 통해 “이제는 한국에 들어와 직접 뛰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달받은 뒤 내린 결단이었지만, 그 선택이 훗날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영구 귀국의 출발점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샌프란시스코에 남겨둔 가족과 미국 사회에 쌓아온 기반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한 채, ‘잠시 다녀오는 일’쯤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이미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국 직후 나는 곧장 여의도 일대로 향했다. 정치의 심장이 뛰는 곳, 국회 앞은 보이지 않는 긴장과 속삭임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국회 정문 건너편의 한 빌딩에 사무실을 얻었다. 창문을 열면 국회의사당의 둥근 돔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권력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응시하겠다는 무언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간판 두 개를 걸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서울사무소’와 ‘재외동포정책연구소’였다. 해외에서 대선 지원을 위해 귀국하는 동포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선거 전략에 녹여내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단순한 연락사무소가 아니라, 해외 민주세력과 국내 정치 현장을 연결하는 교두보를 만들고 싶었다. 사무실은 급히 꾸렸지만, 분위기는 진지했다. 책상과 전화기, 팩스와 복사기가 들여놓아 지고, 벽에는 전국 판세 지도가 붙었다. 미국과 일본, 유럽 각지에서 들어올 동포 지원 인사들의 명단이 화이트보드에 빼곡히 적혔다. 나는 선거 전략 자료를 수집하고, 여론 동향을 분석하며, 필요한 인력을 물색했다. 해외 활동 경험이 있는 실무자와 정책 보좌 인력을 채용하고, 통‧번역이 가능한 청년들도 불러 모았다.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에서 윤호중 부대변인을 연락 책임관으로 지정해주었고, 아태재단에서는 김근식 연구위원과 소통했다. 그리고 연청 중앙회의 강구현 대외협력국장은 거의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각종 필요 사항을 지원했다. 사무실 안은 늘 전화벨 소리와 회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여의도는 낮에는 분주했고, 밤에는 더욱 치열했다. 각 후보 캠프의 움직임, 정계 개편설, 막판 단일화 가능성에 대한 소문이 빌딩 복도를 타고 흘러 다녔다. 그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나는 ‘외곽’이 아니라 ‘내부’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숙소는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마포에 마련했다. 한강 바람이 스치는 비교적 조용한 오피스텔이었다. 낮에는 전략과 조직을 고민하고, 밤에는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샌프란시스코의 가족을 떠올렸다. 전화기 옆에는 아이들 사진을 세워 두었다. 그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이 길이 과연 옳은가.” 그러나 다음 날이면 다시 여의도로 향했다. 국회 돔을 마주 보는 사무실 창가에 서면, 망설임은 잠시 접혔다. 역사의 방향이 요동치고 있었다. IMF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대,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던 그 격동의 시간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관망자가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정치에서 ‘정권교체’라는 말은 선언에 가까웠다. 구조는 견고했고, 지역 구도는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었다. 야권은 늘 분열의 그림자를 달고 다녔고, 19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도 그 불안은 반복될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마음 한편으로는 또다시 문턱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지 우려했다. 그런 흐름을 단번에 뒤집은 장면이 있었다. 1997년 11월 3일, 김대중 후보가 청구동 자택을 찾아가 김종필 씨와 마주 앉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 그 만남은 오랜 경쟁과 경계의 시간을 넘어선 결단이었다. 다음 날 박태준 씨가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해 총재로 추대되면서 연합은 사실상 매듭지어졌다. 정치가 계산을 넘어 결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DJP 연합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친 약칭이었지만, 그 안에는 훨씬 무거운 의미가 담겨 있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로서, 김종필은 국무총리직을 전제로 협력하는 권력 분점의 구도를 제시했다. 그것은 개인적 타협이 아니라 제도적 약속이었다. 서로 다른 지역 기반과 정치적 이력을 지닌 두 지도자가 ‘이길 수 있는 선택’을 위해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미 균열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업과 금융에 대한 불안이 퍼지고 있었고, 거리의 공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초조함이 배어있었다. 유권자들은 변화를 원했지만, 동시에 무너짐은 원하지 않았다. DJP 연합은 그 모순된 요구를 봉합하는 정치적 장치처럼 보였다. 정권교체가 단절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변화’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해외 동포사회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동안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던 호남향우회와 충청향우회 인사들이 같은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여의도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충청 인사들의 발걸음도 부쩍 잦아졌다. 정치적 계산을 넘어, 시대의 흐름을 읽은 움직임이었다. 돌이켜보면 DJP 연합은 선거공학의 산물이라기보다, 한국 정치가 한 단계 넘어가기 위해 감수한 모험에 가까웠다. 외환위기 직전의 불안한 시간 속에서 그 연합은 단순한 전략을 넘어 하나의 분기점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 분기점 위에서, 나는 정권교체가 더 이상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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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
- 소설/연재
- 사랑과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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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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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4)
- 모사 1996년 10월, 나는 워싱턴 본부에서 열린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중앙이사회에 참석했다. 회의장은 어느 때보다도, 다가올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는 의지가 응축된 현장이었다. 참석자들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해외에서 어떤 방식으로 김대중 총재를 지원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논의했고, 특히 미국 내 정치·외교·언론계 인사들이 평가한 그의 대북포용정책과 한반도 평화 구상, 그리고 경제 발전 전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안에 주목했다. 우리는 김대중 총재의 비전을 단순한 선거 구호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검증되고 지지받는 정책 패키지로 보여주기로 뜻을 모았다. 그 일환으로 미국 정·관계 주요 인사들의 지지 발언과 논평, 그리고 1994년 워싱턴 디시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의 역사적 연설을 함께 엮어 한 권의 책자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 책자는 단순한 홍보물이 아니라,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품고 있는 국제적 신뢰와 미래 구상을 증명하는 일종의 ‘정책 백서’이자 ‘희망의 기록’이었다. 이 책자의 배포 방식 또한 전례 없는 전략이었다. 우리는 1997년 새해 첫날부터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전역에서 한국으로 출발하는 모든 직항편의 출국장에서 이 책자를 나눠주기로 했다. 해외에서 출발해 조곡으로 돌아가는 교민, 유학생, 출장자들의 손에 이 자료를 들려 보내는 것이 곧 국내로 메시지를 역수입하는 통로가 될 것이라 믿었다. 이 계획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북미 각 지역의 연청 회원들과 한국인권문제연구소 멤버들이 직접 공항으로 나가 책자를 나누어주었고, 이는 수개월 동안 자발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시민 외교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책자는 여행 가방과 서류가방, 코트 주머니 속에 담겨 태평양을 건너갔고, 비행기가 한국 땅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함께 도착하고 있었다. 이 활동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당시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의 사무총장이자 선거 전략의 핵심 인물이었던 강삼재는 이를 강하게 문제 삼았다. 그는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한 ‘비자금 폭로’ 공세의 선봉에 서 있던 인물이었는데,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에서 오는 비행기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전물이 낙하산처럼 쏟아지고 있다. 선관위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가 ‘문제’로 규정한 현상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전략이 거둔 성과를 증명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던 김대중 후보의 국제적 평가, 외교적 신뢰, 경제적 비전이 해외 승객들의 손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고, 그들은 단순한 유권자가 아니라 ‘정책의 전달자’가 되어 국내 곳곳에 그 내용을 퍼뜨렸다. 그 결과, 김대중 후보는 더 이상 국내 정치의 틀 안에만 갇힌 인물이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받는 지도자,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설계할 준비가 된 국가적 대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건네진 한 권의 책자는 종이 묶음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희망이었고, 그 희망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한국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1997년 4월 초, 김대중 후보는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키고, 미국 내 지지 기반을 넓히며, 자신의 대북 포용 정책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확보하기 위해 9일간의 미국 방문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출판된 저서 <대중참여경제론>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경제 철학과 민주적 시장 비전을 소개했고, 뉴욕에서 열린 교민 환영 행사에서는 재외동포법 제정과 해외 동포들의 권위 신장을 약속하며 정치적‧정서적 지지를 끌어냈다. 나는 그 여정의 상당 부분을 함께하며, 한 정치인이 국제무대에서 자신을 어떻게 증명해 나가는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여러 일정 가운데서도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순간은 4월 9일, 워싱턴 디시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 만찬 연설이었다. 그날 그는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3단계 통일론과 4자회담’을 주제로 연단에 섰다. 분단의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짚으면서도, 평화와 공존을 향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했다. 연단 위에서 보여준 그의 논리적 설득력과 도덕적 확신, 그리고 평화를 향한 흔들림 없는 의지는 연설장을 가득 채운 미국 내‧외신 기자들에게도 강한 울림을 주었다. 경계와 의심의 눈빛은 점차 이해와 공감으로 바뀌었고, 그의 연설이 끝날 즈음에는 모두 일어서서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호했다. 김대중 후보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 정부 고위 인사들과 의회 관계자들을 만나 한미 통상 갈등 완화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얼어붙은 남북 관계를 다시 대화의 국면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국내 정치용 발언이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를 국제적 협력의 틀 속에서 풀어가려는 장기적 전략이었다. 이번 방미를 통해 그는 국제무대에서의 외교적 역량을 입증하며, 미국 내 보수층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안보에 취약한 정치인’이라는 선입견을 상당 부분 불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강경한 이념이 아니라, 원칙과 현실, 이상과 전략을 동시에 갖춘 지도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의 외교적 역량은 이 여행을 계기로 보다 분명하게 국제사회에 각인되었다. 특히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은 이후 그의 햇볕정책으로 구체화되는 대북 포용 전략의 사상적 출발점이자, 이를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알리는 결정적 계기로 평가받게 되었다. 김대중 후보의 이번 방미 일정 중, 나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본부 이사장 이영작 박사와 중앙이사 세 명과 함께 후보의 숙소를 찾았다. 목적은 단순했다. 미주 각 지회에서 어렵게 모은 후원금을 직접 전달하고, 동포들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방문은 예상치 못하 긴장과 깊은 울림을 남기는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호텔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이영작 박사는 중앙이사들을 대표해 후원금을 담은 가방을 내밀며 농담처럼, 그러나 지나치게 직설적인 말을 덧붙였다. “이 후원금은 여기에 동석한 이사들이 마련한 것입니다. 모두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분들이니, 김 총재님께 투자한 셈입니다. 당선되시면 이보다 더 크게 갚으셔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실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김대중 후보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이내 단호한 음성이 방 안을 가르듯 울려 퍼졌다.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대가를 바라는 돈은 받지 않습니다.” 후보는 가방을 가리키며 “다시 가져가라”라 말했고, 그 단호한 태도에는 타협 없는 원칙과 정치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존이 담겨 있었다. 순간 우리는 말문을 잃었고, 당호감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채 서로의 눈을 피했다. 우리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총재님, 이 박사의 말은 의례적인 인사일 뿐입니다. 저희의 본의가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김 후보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응접실에는 길고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그 시간은 몇십 분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한참처럼 느껴졌다. 후회와 불안, 그리고 지도자 앞에서의 경솔함에 대한 자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 지나 문이 다시 열렸고, 김 후보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에는 노여움 대신 깊은 사색과 절제된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주지역 동지들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그렇게 마하며 우리를 바라보았고, 이어 조용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도자는 늘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야 합니다. 그래야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반발만 앞서야 합니다. 한발 앞서가면, 뒤따르는 사람들의 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꼭 반발만 앞서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이끌어야 합니다.” 그날의 장면은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김대중이라는 지도자의 철학과 도덕적 기준, 그리고 권력보다 원칙을 먼저 두었던 그의 품격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 정치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한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으로 경제가 흔들리고, 국민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이번 대선에는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했지만, 실제 판세는 한나라당(신한국당과 민주당의 신설합당)의 이회창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자유민주연합과 후보 단일화), 그리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맞붙는 3자 구도로 압축되고 있었다. 선거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거칠었다. 1992년 대선자금 문제, 한보사태, 김현철 비리 사건, 그리고 IMF 구제금융 사태까지 연이어 터지며 민심은 격앙되어 있었다. 특히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은 최대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며 선거판 전체를 뒤흔드는 폭풍이 되었다. 한국 사회는 도덕성과 책임,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격랑 속에서, 나는 북미지역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연청 회원들뿐 아니라,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미주 동포들을 폭넓게 규합해 ‘대연합’을 이루고, 이를 기반으로 한 공식 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북미 전역을 순회하며 각 지역의 인사들과 만나 김대중 후보의 비전과 시대적 의미를 설명했고, 민주주의 회복과 경제 재건을 위한 그의 리더십이 왜 필요한지를 호소했다. 단순한 지지 요청이 아니라, 역사의 한 장에 함께 서자는 설득이었다. 동시에 나는 각 지역의 대표들을 한국과 가장 가까운 서부지역인 샌프란시스코로 모이게 하여, 흩어진 힘을 하나로 결집된 모습으로 보여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눈에 보이는 연대, 행동으로 증명되는 지지, 그리고 북미 동포 사회의 조직된 역량을 한국의 선거본부에 분명히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파밸리에 거주하고 있던 세계적인 소립자 물리학 권위자이자 전 MIT 공과대학 교수인 신은호 박사를 직접 찾아갔다. 그는 학문적 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미주 사회에서 존경받는 원로였다. 나는 그에게 김대중 후보의 미주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며, 향후 계획과 전략, 그리고 북미 조직의 역할을 상세히 설명했다. 민주주의와 개혁, 그리고 시대적 소명을 이야기하던 그 자리에서, 그는 잠시 침묵한 뒤 조용히 수락 의사를 밝혔다. 그의 결정은 우리 조직에 큰 신뢰와 무게를 더해주었다. 그는 1970년대 재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율산그룹 신선호 전 회장의 형으로, 율산그룹의 초기 성장에 기여했던 인물이었다. 학문과 산업,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영역을 넘나든 그의 이력은 후원회에 상징적 힘을 부여했다. 이러한 조직 구성과 전략은 북미주 각 지역에 공유되었고, 동시에 한국의 새정치국민회의 대선본부에도 공식적으로 보고되어 추인을 받았다. 이는 단순한 해외 지지 활동을 넘어, 본국 선거 전략의 한 축으로 인정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마침내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지역 대규모 대표단이 한자리에 모이는 ‘김대중 후보 당선을 위한 전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 행사의 기획과 조직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 행사는 단순한 해외 지지 집회가 아니었다. 선거 국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전략적 정치 작전이었으며, 성공의 관건은 정밀한 준비와 철저한 보안, 그리고 국제적 상징의 창출에 달려 있었다. 나는 행사 일정 확정, 장소 선정, 프로그램 기획뿐 아니라, 한국에서 올 핵심 인사들의 초청, 숙소 예약, 이동 동선, 의전, 언론 대응 전략까지 전 과정을 직접 통제했다. 작은 착오 하나가 전체 작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모든 결정은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한국의 정치판은 폭풍 전야와 같았다. 신한국당은 궁지에 몰린 선거 판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김대중 후보가 67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전격 제기했다. 이는 즉흥적 공격이 아니라, 이회창 후보 측과 강삼재 사무총장이 주도한 치밀한 기획 폭로였다. 언론은 이를 집중 보도했고, 여론은 요동쳤다. 이 공세가 계속된다면, 김대중 후보의 도덕성과 정치적 정당성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판단했다. 이 싸움을 국내 정치 프레임 안에서만 치르면 패배할 수 있다. 돌파구는 한국 내부가 아닌, 국제사회라는 더 넓은 무대에서 김대중 후보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즉, 네거티브 공방의 프레임을 넘어, 김대중을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주의 지도자로 재정의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나는 국제적 상징 사건을 비밀리에 기획하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정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던 해리 김 씨와 백종민 씨를 동행해, 윌리 브라운 샌프란시스코 시장과의 면담을 성사시켰다. 이 만남은 단순한 친선 방문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와 외교적 감각, 상징적 결단을 요구하는 고위급 접촉이었다. 나는 전진대회의 취지와 김대중 후보의 민주화 투쟁, 한국 현대사의 굴곡,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차분히 설명했다. 또한 김 후보의 정치 철학과 민주주의 비전을 담은 영문 출판물과 자료를 전달하며, 이 행사가 단순한 선거 이벤트가 아니라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조명하는 국제적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어조로 핵심 제안을 꺼냈다. 전진대회가 열리는 10월 11일, 샌프란시스코시가 공식적으로 ‘김대중의 날(Kim Dae-jung Day)을 선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윌리 브라운 시장은 깊은 관심을 보였고, 마침내 그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갖는 정치적 파급력을 감안할 때, 성공을 위해서는 철저한 비밀 유지가 필수였다. 나는 이 사실을 행사 당일까지 극비로 관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한국의 여권과 정부, 그리고 해외 공관이 외교 채널이나 총영사관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거나 선언을 무력화하려 할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작전을 소수의 핵심 인물만 아는 극비 프로젝트로 관리했다. 마침내 행사 당일, 북미 전역에서 수백 명의 대표단이 샌프란시스코에 집결했다. 한국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대선기획본부장, 오유방 아태재단 후원회장, 그리고 대중적 상징성을 지닌 가수 이선희, 판소리 신동 유태평양이 참석하며 정치적‧문화적 무게를 더했다. 행사장은 기대와 긴장, 그리고 역사적 전환점을 앞둔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샌프란시스코 시정부가 공식 문서를 통해 ‘김대중의 날’을 선포하고, 선포장을 이종찬 본부장에게 전달했다. 순간 행사장은 술렁였다. 한국에서 온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경외, 그리고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했다, 이 선언은 단순한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김대중 후보가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 지도자로 공인받았다는 상징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곧바로 국내로 긴급 전문을 송고했다. 이 소식은 한국 정국에 즉각적인 파문을 일으켰고, 여권의 네거티브 공세 흐름을 흔드는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이종찬 본부장은 왜 이 중대한 사실을 사전에 공유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외교적 방해 가능성, 정치적 리스크, 그리고 극비 추진이 성공의 전제였던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판단이 정확했습니다. 매우 잘했습니다.” 그날 나는 확신했다. 정치는 숫자와 공방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타이밍, 그리고 국제적 무대에서 연출된 단 한 장면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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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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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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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3)
- 전진 김대중 선생이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마치 긴 겨울 끝에 들려오는 첫 종달새의 울음처럼 조용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전해졌다. 정계를 떠나겠다는 선언 이후, 그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 그리고 한국 정치사의 상처와 희망을 다시 써 내려가고 있었다고 들었다.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한발 물러나,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며 향후의 정치 행보를 구상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정초, 그는 다시 역사의 무대 위에 조용히 발을 디뎠다. 햇볕정책의 산실인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을 설립했다. 총칼이 아니라 사상과 대화로 한반도의 얼어붙은 땅을 녹이겠다는 다짐, 민주주의와 평화를 연구하고 기록하며 전승하겠다는 조용한 선언이었다. 그 재단의 미주 지부 이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나에게 전해졌을 때, 나는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 개인의 직함이 하나 더 늘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한 줄기에 손을 얹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 이민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국의 분단과 민주주의, 그리고 김대중 선생이 걸어온 고난의 길이 겹쳐지며 마음속에서 묵직한 책임감이 일어났다. 1995년 4월 말, 김대중 선생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은, 나에게 하나의 소환처럼 들려왔다. 부시 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의 정계·언론계·학계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통일의 길을 논의하고, 오리건 포틀랜드 주립대학교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는 일정이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포틀랜드의 공기는 유난히 맑고 차분했다. 봄빛으로 화창한 거리, 잔잔히 흐르는 윌래밋 강, 그리고 호텔 로비에 감도는 절제된 긴장감 속에서 나는 나의 무거운 업보와 같았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개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상징과 운명을 맞이하는 심정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섰을 때, 공간의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으나 눈빛만은 여전히 밝고 단단했다. 수많은 좌절과 위협, 추방과 패배를 통과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분노보다 오래된 연민, 권력보다 깊은 책임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과거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대학 시절의 뜨거웠던 날들, 거리의 함성과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 그리고 결국 조국에서 밀려 나오던 그 날의 공기까지. 그는 내 얼굴을 오래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소.” 그 한마디는 위로이자 인정이었고, 오랜 세월 가슴에 쌓여 있던 기억들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손길 같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의 삶을 지켜본 사람처럼 말을 이어갔다.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살아나는 것이오.” 그의 말은 칭찬이기보다는 당부에 가까웠다. 상처를 훈장처럼 여겨 달라는 요청, 그리고 그 상처를 미래를 위한 증언으로 남겨 달라는 부탁처럼 들렸다. 그가 내 어깨에 얹은 말 한마디는 격려였고, 동시에 역사를 향한 책임의 무게였다. 그와의 첫 만남은 더 이상 과거의 업보로서가 아니라 앞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새롭게 자각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그와의 첫 악수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네는 신뢰의 손짓처럼 내 가슴속에 오래 남게 되었다. 1995년 9월 5일,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열리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대회에 초대받았다. 나에게는 오랜 세월 품어온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현실 정치와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는 미주지역 민주동포를 대표하는 명예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해 온 수많은 동포의 기대와 책임을 함께 안고 있었다. 대회장 안팎에는 변화에 대한 갈망과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펜싱경기장 광장에는 주요정책을 대변하는 참여마당, 통일마당, 21세기마당 등의 무대를 마련, 아치형 풍선과 깃발 등으로 장식한 뒤 풍물패를 동원해 잔치 분위기를 돋웠다. 장내 문화행사 때는 시민들의 애환을 그린 마당극과 일반인과 영입인사들의 희망사항이 멀티비전으로 방영되었다. 원로가수 최희준 씨와 추미애 전 판사가 전체 대의원을 대표해 대의원 선서를 낭독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형식적 선언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며, 평화적인 민주정부로의 수평적 교체라는 목표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처럼 울려 퍼졌다. 김대중 선생이 총재로 선출되는 순간, 장내를 가득 메운 박수와 환호 속에서 나는 민주화의 긴 여정을 버텨낸 지도자가 다시 한번 시대의 중심에 서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감회에 젖었다. 창당대회 다음 날 오후, 나는 마포구 서교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해외동포들이 함께하는 간담회에서 사회를 맡았다. 전날의 창당대회가 남긴 열기와 기대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행사장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먼 타국에서 마음을 보태온 동포들의 진지한 표정으로 가득했다. 김대중 총재는 오랜 세월 민주화와 조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해외동포들의 노고를 하나하나 짚으며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했다. 그는 특히, 국제사회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리고, 물심양면으로 조국을 지지해온 동포들의 역할이 오늘의 변화와 희망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김 총재는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 없는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과제를 언급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해외동포들이 계속해서 도덕적·정치적·정서적 지지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해외에 살고 있다는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동포들의 관심과 연대, 그리고 책임 있는 참여가 조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날 간담회는 단순한 격려의 자리를 넘어, 조국의 미래를 해외동포들과 함께 설계하고 다짐하는 연대의 장이었고, 나에게도 한국 현대정치의 한 장면을 현장에서 체감하게 한 뜻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의 활동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나는 2년 뒤로 다가온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미 전역에 흩어져 있던 민주 성향의 해외동포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동부와 서부, 중남부 각 지역의 동포사회 인사들과 연락망을 정비하고,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지역별 모임과 합동 간담회를 이어가며, 장차 선거 국면에서 즉각 가동할 수 있는 선거지원 네트워크를 미리 결집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특히, 나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동지들과 함께, 미주 지역에서 가능한 대선 지원 전략을 다각도로 연구했다. 미국 내 언론과 학계, 시민사회와의 연계를 통해 김대중 총재의 비전과 정책을 알리는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해외 여론이 한국의 김 총재를 지지하도록 유도하는 외교적‧문화적 접근도 함께 고민했다. 이듬해,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정세균 의원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연청’으로 알려진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의 중앙회장을 맡게 되었다며, 나에게 중앙회 부회장직을 맡아 함께 조직을 이끌어 달라고 제안했다. 민주개혁 세대의 결집과 정치적 역량 강화를 통한 정권교체를 목표로 하는 조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중앙회 부회장으로서, 우선 해외 동포사회 내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한 지원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단순한 세대 모임이 아니라, 향후 대선이 본격화될 경우 후보후원회를 신속히 출범시킬 수 있는 예비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해외에서 축적된 인적 자원과 재정적·정서적 지지를 체계적으로 모아, 조국의 정치 변화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준비였다. 이후 나의 일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앙회 당직자들과의 공식적인 상견례, 그리고 김대중 총재에게 그간의 활동을 직접 보고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했다. 출발을 앞두고 중앙회에 귀국 일정과 방문 목적을 전달하면서도, 이번 방문이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정치적 신뢰와 조직적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뜻밖의 장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장 바깥에서 나를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현직 국회의원이자 연청 중앙회장, 그리고 나를 부회장으로 임명한 정세균 의원이었다. 고위 정치인이 직접 공항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본인의 차를 직접 운전하며 나를 일산에 있는 김대중 총재의 자택까지 안내했고, 총재와의 면담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다. 총재와의 면담은 단순한 인사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해외에서 수행해온 활동과 민주동포 사회와의 연대, 그리고 향후 미주지역에서 연청과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감당해야 할 역할에 대해 보고하며, 한 시대를 이끌어온 지도자 앞에서 나 자신의 각오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의 눈빛과 말 한마디에는 긴 투쟁과 고난, 그리고 역사를 관통해온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후 며칠 동안 나는 일산 자택에 머물며 연청의 전국조직을 순회할 계획을 구체화했다. 각 지역 회장단과 만나 조직 간 연대를 강화하고, 중앙과 지역이 하나의 전략적 흐름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협력과 결속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지역마다 다른 정치적 환경과 민심, 그리고 세대의 고민을 직접 듣는 과정은 나에게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조직 관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숨결을 다시 몸으로 체득하는 여정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 뒤에도 나의 활동은 더욱 분주해졌다. 나는 거의 매달 한 차례 이상 서울을 방문하며 연청의 전략 수립과 해외 활동역량을 확대하는 기획 실무를 챙겼다. 국내외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국제적 시각에서 조직의 역할을 넓히기 위한 방안들을 고민하며 실행에 옮겼다. 어떤 날에는 김포공항에 새벽 비행기로 도착해 하루 종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뒤, 다시 저녁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적도 있었다. 짧은 체류와 긴 이동의 반복은 육체적으로 고단했지만, 그만큼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다잡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 시기는 나에게 있어 국경을 넘나들며 조직과 시대의 요구에 응답해야 했던, 치열하면서도 의미 깊은 활동의 연속이었다. 삶과 역사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으려 했던 나 자신의 초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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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사랑과 야망 (23)







